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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미 수필/ 절대로라는 말은 절대로

허순미 | 기사입력 2021/03/24 [14:36]

허순미 수필/ 절대로라는 말은 절대로

허순미 | 입력 : 2021/03/24 [14:36]

 

 

  ▲ 허순미 수필가
약력
2020 문학이후 수필 등단
동화 구연가.
극단 마구마구 회원
성포 문학회 회원

 

콜록콜록 기침 소리가 들린다. 잠시 주춤하더니 이번엔 참을 수 없다는 듯 억지 기침을 쏟아낸다. 좁은 침대 위에 뜨거운 찜질팩을 깔고 누워 옴짝달싹 못 하는데 기침 소리가 자꾸 귀에 걸린다.

 

소리만 듣고 상대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그것도 모른다. 알 수 있는 건 심한 감기에 걸린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적당하게 식은 찜질팩 덕분에 깜빡 잠이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간간이 기침 소리와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등허리가 눅눅해질 때쯤 물리치료사가 빛바랜 커튼을 젖히며 들어선다.

 

“전기치료 해 드릴게요.”

 

어깨가 아파서 치료를 받는 중이다. 웅크린 자세로 옆으로 누우라고 한다. 식어서 서늘해진 찜질팩이 빠져나가고 고무공을 반으로 잘라 놓은 모양의 전기치료 장치가 어깨와 목 주변에 다닥다닥 붙는다. 연결된 선을 따라 전기작동이 되면서 꾹꾹 누르고 타닥타닥 치기도 한다. 찜질팩을 대고 누울 때처럼 눈을 감았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불편하다.

 

얇은 칸막이에 출입구를 가린 커튼이 전부인 치료실은 방음은커녕 큰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허술하다. 물리치료사는 환자가 있는 칸을 옮겨 다니며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비슷한 말과 치료를 한다.

 

칸막이 너머에서 전화음이 울린다. 굵직한 목소리의 남자가 통화를 시작한다. 일에 관련된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전기치료기의 펌프질 소리에 섞인 남자의 통화는 소음이다. 생각 같아선 헛기침으로 얼른 끊으라는 재촉을 하고 싶었다. 남자의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요란한 전화음이 울린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남자와 여자의 통화가 뒤엉킨 치료실 안은 시장바닥처럼 혼잡해졌다. 남자의 통화가 끝났다. 여자는 조금 전 남자의 통화를 의식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병원에서 물리치료 중이라며 통화를 시작했다. 굵은 남자 목소리 대신 여자의 갈라진 목소리가 치료실 안을 채운다.

 

타닥타닥 꾹꾹 전기치료가 진행되는 십 분이 마치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어깨가 아파서 왔는데 두통까지 생기려고 한다. 병원을 나서며 치료를 받고 나오는 사람들을 쭉 훑어 내렸다. 통화자가 누군지 찾아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내 표정을 본 그가 부끄러움을 느끼길 바랐다.

 

어깨 통증은 물리치료 몇 번으로 낫지 않았고 몸이 아프니 마음도 불편해 작은 일에도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병원을 오가는 동안 치료실 안의 상황은 늘 비슷했다. 병원에 있으면서 카페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집이라는 사람도 있다. 옆에 누가 있다는 걸 잊은듯한 통화다. 아픈 어깨의 통증이 나아지고 움직임이 부드러워지면서 물리치료를 받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어깨가 편해지니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다.

 

며칠 뒤 한순간의 방심이 문제였다. 당분간 무거운 것을 들지 말라는 의사의 말을 잊고 화분을 옮기다가 어깨를 삐끗했다.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찜질팩을 대고 꼼짝없이 누워 있는데 어디선가 전화음이 울린다. 한참을 울려도 받는 사람이 없다.

 

‘누군데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중얼거리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화음은 내 가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휴대전화 음을 진동으로 전환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 것이다. 찜질팩이 밀리지 않도록 큰 수건으로 양쪽 팔을 눌러 놓아 쉽게 일어설 수도 없는데 난감하다. 벽에 걸린 가방은 얼른 열라고 아우성이다. 수건을 풀고 허겁지겁 전화기를 꺼냈다.

 

오래 연락이 닿지 않았던 중학교 동창이다. 순간 받을까 말까 하는 갈등이 생긴다. 치료를 받고 통화를 해야 하는데 반가운 마음에 눈을 질끈 감고 덥석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연락이 된 친구에게 아파서 병원에 왔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리치료사가 전기치료를 하려고 들어서는 걸 보며 전화를 끊었다.

 

치료가 끝났다. 밖으로 나갈 일이 걱정이다. 칸막이 너머의 사람들은 병원이 아닌 척하는 나의 거짓말을 다 들었다. 작은 소리로 통화를 했지만 내 목소리는 치료실 안을 날아다녔을 것이다. 그들도 나처럼 짜증이 났을 것이고 내가 누군지 궁금했을 것이다. 헛기침으로 통화를 멈추라는 신호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오래전 ‘절대로’란 말의 무력함에 관해 쓴 책을 읽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절대로란 말이 얼마나 힘없이 무너지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일 이야기를 하던 그 남자. 갈라진 목소리로 긴 통화를 하던 그 여자. 카페라고 거짓말을 하던 그.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절대로 그들처럼 하지 않을 거라는 가볍디가벼운 다짐만 했다. 그 절대로가 우수수 부서져 내린다.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왔다. 종종걸음 뒤로 부끄러운 웃음이 따라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나의 오만 ‘절대로’를 차창 밖으로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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