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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안/수필가> 낳고, 낳고 또 낳았더라

안산신문 | 기사입력 2021/03/31 [22:13]

<이주안/수필가> 낳고, 낳고 또 낳았더라

안산신문 | 입력 : 2021/03/31 [22:13]

 

 

  ▲ 이주안/수필가
 약력
성포문학회 회원

 

얼마 전 정기적으로 하는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별일 없을 거라 기대했다. 예방이 최고라는 생각에 밤새 화장실 들락날락 요란 떨며 대장내시경까지 했다. 결과는 괜찮은데 고지혈증 수치가 높다. 의외의 결과에 뜨악해진 나를 보며 의사는 과체중도 아니고 식습관도 문제없다면 체질일 경우가 많다 한다.

 

아버지는 75세 되던 봄날, 평소처럼 할 일 마치고 밤에 주무시듯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일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지금 와 가만가만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2남 2녀 중 막내로 형제 중 가장 오래 사셨다. 내겐 큰아버지인 아버지 형도 회갑 전이었고, 위로 고모 두 분도 60세, 70세 전후로 돌아가셨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와 어렵게 사셨다고 했다.

 

갑자기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 집안이 단명하는 집안이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과 달리 걱정되는 마음이 쓰나미 밀려오듯 한다. 하나 있는 아들도 결혼시켜야 하고 아직은 할 일이 남았다. 큰일이 난 듯 두 살 터울 언니에게 건강검진 결과를 얘기하니 언니는 벌써 2년 전에 같은 결과로 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2년 전이라면 지금의 내 나이다.

 

가족사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가끔 병원에서 하는 문진표 ‘없다’에 모두 체크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의학이 지금처럼 발전되기 전 아버지와 형제들은 원인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나도 건강한 게 아니었다. 아무 징후도 나타나지 않는 고지혈증으로 예고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사는 고지혈증의 악화로 나타나는 결과를 설명하면서 놀란 내 눈치를 본다. 요즘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는다며 약만 꾸준히 먹으면 된다고 아이 어르듯 한다. 그것도 죽을 때까지 계속 먹어야 하는 약이란다.

 

젊었을 땐 몰랐던 일이 나이 들어가며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셋째 오빠는 미남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젊어서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중장년이 되어가는 오빠들을 보면 하나같이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숱이 적어지다가 점점 이마가 넓어지고 반들반들해져 간다. 안중 시내 나갔다가 낯선 사람이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을 대며 누구네 아들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할 때는 모두 놀라고 만다. 나이 들어가며 어쩌면 그리 아버지를 닮아 가는지 신기하다.

 

두 딸 중 언니는 성격과 외모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고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엄마 얼굴 속에 외할머니가 있다고 한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일이다. 그 말을 듣고 거울 앞에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 얼굴에 엄마 모습이 언뜻 보였다. 세상에는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닮아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누구보다 부모를 닮아간다는 것은 익숙해서 좋다. 만약 내가 생뚱맞은 사람을 닮아간다면 어떨까 싶다. 그 사람이 외모는 물론 여러 면에서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낯설기만 할 것이다. 이제 두 분 모두 이 세상에 안 계시는 지금, 두 분을 닮은 자식들이 아버지가 되고 엄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당연한 일인데 새삼 신기하다.

 

우리 오 남매는 부모님을 닮아 검소하고 성실하다. 모두 범생이다. 하나같이 예능인 기질이 없어 재미가 없는 게 좀 아쉽다. 그렇다고 크게 불편하지 않다. 익숙한 모습이라 주변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편하다.

 

아들 역시 우리 부부를 닮아갈 것이다. 시아버지의 탈모를 이어받아 남편의 탈모도 상당히 진행된 상태다. 게다가 친정아버지까지 탈모가 심했던 터라 아들은 벌써 모발 상태에 민감하다. 아무리 관리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라는 걸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남편도 수년 전 탈모로 고민하다 이식 수술까지 했지만 진행되는 탈모는 막을 수 없었다.

 

나이가 드니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소리가 들린다. 평소에 무심하게 지나쳤다는 뜻이다. 사소하게 여겼던 것들이 소중하고,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별것 아닐 때가 있다.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이 입에 발린 소리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말이 객관적인 사실이라 믿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나이 들어감을 받아들이니 마음도 편안해진다.

 

나이 들며 좋은 점도 있다. 모든 게 느긋하다. 안달복달하지 않아 도인의 경지에 가까워지는 듯하다. 무엇보다 누구와의 경쟁심에 불타지 않는다. 내가 누구보다 뒤떨어졌다는 열패감에 젖어 우울해하지 않는다. 또 내키지 않는 일은 싫다고 말하는 용기도 생겼다. 원하지 않는 것을 굳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내 삶의 질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고 누구에 의해 휘둘리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중심에 나를 둔다. 내가 그 일을 원하지 않거나 그 일로 행복하지 않다면 과감히 거절한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생각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미숙하고 불완전하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나야 제대로 된 사람으로 완성되나 싶다. 아마 평생을 고민하며 살지도 모를 일이다. 삶의 방식에 대한 설명은 부질없다. 그러니 그저 주어진 삶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참이다.

 

먼 훗날, 아들이 내 나이쯤 되어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아들은 뭐라 할까. 내가 내 부모를 닮아가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처럼 아들도 그럴까 싶다. 나와 남편에게서 외모뿐만 아니라 좋은 점도 물려받았다고 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들이 낳은 손주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그 모습 속에도 우리가 숨어 있겠지. 지금까지 그래왔듯 보이지 않는 인연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러가는 일은 참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신약 성경 처음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한참 이어진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말한다. 예전에는 그 깊은 의미를 몰라 지루하기만 했다. 그런데 나이 들며 거기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은 한 개인이 아니고 내 안에 수많은 조상이 들어 있는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많은 요소의 유전자가 내게 잠재되어 있다. 그러니 나는 하나의 소중한 역사물이다. 그 역사가 자녀를 통해 흐르는 물처럼 이어진다.

 

아버지도 막내고 나도 막내로 태어나 친가 외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뵌 적이 없어 늘 아쉬웠다. 한없이 너그러운 할머니 사랑을 받는 친구들이 마냥 부러웠다. 어느 순간 내 모습 속에 그분들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한 내가 아닌 물줄기 같은 흐름 속에서 작지만 소중한 부분이다. 낳고, 낳고 또 낳고. 그렇게 역사는 끊임없이 사람에 의해 흘러가는 중이다.

 

다행히 고지혈증은 약만 꾸준히 먹으면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요일이 표시된 약통을 준비했다. 간디는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라’고 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언제 마지막이 온들 무엇이 문제이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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