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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박종인/수필가> 아파트

안산신문 | 기사입력 2021/04/21 [21:42]

<수필 박종인/수필가> 아파트

안산신문 | 입력 : 2021/04/21 [21:42]

 

  ▲ 박종인
제 28회 인천시민문예대전 소설대상 수상
서울예술 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 중

 

여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창틈으로 맵고 찬 밤이 밀려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봤다. 남자가 없다. 품에 안은 강보엔 아기도 없다. 여자는 괜히 몸을 떨었다. 물을 마시러 갔겠지. 방안 가득한 어둠이 여자의 말을 먹었다. 갑자기 방이 낯설어졌다, 여자는 거실로 나가 불빛이 새어나오는 아기의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휑뎅그렁했다. 정면의 창문은 활짝 열린 채 성긴 눈이 들이닥치고 남자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방바닥의 한 점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다 아기를 찾았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기뿐만 아니라 가구며 액자, 아기 침대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여자는 떨리는 다리를 끌고 겨우겨우 창문에 다다랐다. 차가운 눈보라가 거세게 커튼을 흔들었다. 밑을 내려다보았다. 일층에선 부서진 가구들 사이에서 경비실의 김 씨가 입을 벌리고 위를 쳐다보았다. 여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누군가 여자의 등을 떠밀었다. 남자였다. 여보, 불이야 어서 나가야 돼, 남자의 초점 없는 눈은 허공을 떠돌았다. 창틀로 올라간 남자가 두 팔로 여자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여자는 남자와 실랑이하다 균형을 잃었다. 팽팽하던 실이 끊어지듯 남자는 여자의 손을 놓쳤다. 11층의 허공으로 떨어졌다, 난삽하게 떨어지는 눈송이사이에서 남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거꾸로 떨어지던 잠옷이 펄럭인다 싶었을 때 눈이 얕게 쌓인 시멘트 바닥으로 붉은 피가 넓게 퍼졌다. 여자의 눈이 컬러 빛을 잃었다. 붉은 피가 검은 색이 되어 흐릿하게 흘렀다.

 

여자는 휑한 방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서걱거리는 입안의 침을 아무렇게나 뱉고 홀쭉한 배를 껴안았다, 바람이 스케이트 날처럼 여자의 살을 베고 갔다. 여자가 주섬주섬 창틀에 올라갔다. 방향 감을 잃은 눈이 끊임없이 내렸다. 밑을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일층이 발등 옆에 붙은 그림 같았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 어디선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강보에 싸인 아기가 전나무 가지 사이에서 울고 있었다. 잿빛 세상 속에서 강보만이 하얀 색으로 되돌아왔다. 여자는 눈을 찡그리고 허리를 숙였다. 강보로 보이던 쌓인 눈이 돌풍에 흩어져 솟구쳤다. 아파트 벽을 타고 오르는 눈은 보였다 안보였다 불빛과 어둠을 차례로 지났다. 아기가 흔들던 모빌조각의 그림자 같았다. 올라온 눈보라가 여자의 얼굴 가까이에서 머뭇거렸다. 훅 하고 여자를 밀었다. 여자가 방바닥으로 쓰러졌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건물 벽을 기어오르던 눈은 여자의 창가에서 휘돌고 아기의 울음소리는 윙윙거리며 단지 전체를 에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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