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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삼컬럼- 모친 생각(1)

김희삼 | 기사입력 2022/01/05 [18:21]

김희삼컬럼- 모친 생각(1)

김희삼 | 입력 : 2022/01/05 [18:21]

 

 ▲ 김희삼 (미래창조경영연구원장)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쓰고자 한다. 몇해 전 지역 신문에다 가끔씩 어머니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 나처럼 시골 출신 독자들로부터 ‘공감한다’라는 전화를 받았고 요즘도 알지도 못하는 어머니 편찮으신 데는 없으신가 안부를 묻는다. 하여 메모해두었거나 기고한 것을 얼기설기 정리해서 다시 손가는대로 갈겨 써보기로 했다. 이것저것 내용을 보태고 수정하여 썼으니 말하자면 개정증보인 셈이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좀 부끄럽지만 우리 집안 전체를 개괄한다. 어머니의 친정 즉 내 외갓집은, ‘외갓집’이라는 게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저수지를 지나 둬 식경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고을 외곽 삼머리 고개 너머에 있었으며, 역시 그래야 되듯이 입춘대길방(立春大吉榜)이 붙은 소슬대문을 끼기긱 밀고 들어가면 깔끔한 마당이 있고 모퉁이를 돌아가면 우물 속에 뭉게구름이 솜이불처럼 떠가는 고풍스러운 부잣집이었다. 90년 전 어머니는 이 집에서 경주 최씨 가문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 시절 아이들이 다 그랬듯이 어머니도 보통집 가시네처럼 동생들 업어 키우며 농사일과 부엌일 돕는 처자로 장성하여 중매쟁이 만나 아버지한테로 시집 온 것이다. 우리집 즉 조부님 댁은 변변한 면장 하나 배출하지 못한 한미한 집이었다. 단지 살아생전 조부님이 마을 유래에 대해 조예가 있는 편이어서 각종 대소사에 의도적으로 관여하였는데 예컨대 마을 수로(水路)나 상량식(上樑式) 같은 것에 다툼이 생기면 촌장이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와 조부님 조언을 들어가곤 했다는 마을 사람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조부님은 기침깨나 하는 ‘재야 유지급’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대개 그런 분들이 신앙처럼 받들고 사는 것은 유림, 문중, 선영, 시제(時祭) 같은 창연한 것들이다. 진중한 당골래와 경건한 유교와 낯익은 토속 신앙과 안온한 전래양속이 골고루 뒤섞인 그들만의 조상모시기 방식은 찬란한 겉치레와 비가성비 때문에 서양 문물이나 기독교 사상에 의해 가혹하리만큼 격리 받아왔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런 형식과 겉치레를 통해 그들은 조상을 만나고 마을을 형성하고 자손을 퍼뜨리고 죽음을 준비했을 것이다. 호열자에 걸린 아이를 밤중에 길거리에 앉혀놓고 땀을 뻘뻘 흘리며 식칼로 악귀 죽이는 시늉을 하며 지극 정성을 다해 주문을 외는 마을 촌장의 진실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시대적 환경에서 김해김씨 문경공파(文敬公派) 후손인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몸에 감고 중절모에 회색 두루마기 날리며 인근 해제면(海際面) 향교는 물론 멀리 김해 수로왕(首露王) 능까지 출타하던 조부님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조상모시기에 심혈을 기울이시던 조부님은 일가 제족들과 합자하여 문재답도 마련하고 인근 무안에서 열흘에 걸쳐 나룻배로 상석과 비석을 운반하여 고을 남서쪽에다 정성껏 선산을 조성했다. 그 선산이 우리 김씨네 집안이 매년 시월상달에 시제를 지내는 시향산(時享山)이다. 선산은 자그마한 야산 중간에 소박하게 자리잡아서 주위는 가시덤불이 무성하지만 옆으로 너른 서해바다가 펼쳐지고 북은 바람막이가 되어있어 단정하다. 옛 군인들의 투구처럼 생겼다 해서 투구봉으로도 불리는 그 시향산에서 김씨네 자손들은 해마다 유세차 축문을 외며 조상들에게는 극락왕생을 또 그들의 후손들에게는 부귀다남(富貴多男)을 빌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집으로 시집왔는데 위로는 호랑이같이 무서운 시아버지와 시숙님에서 밑으로는 총각 시동생들과 시집와서 똥 걸레 빨고 포대기로 업어 키웠다는 당신 시누이이자 나의 막내 고모에 이르기까지 대식구가 즐비하게 한 집에서 또는 이웃하며 살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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